광양에는 예로부터 광양을 대표하는 다양한 해양유적이 있다. 그 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김 시식지, 하포항과 광양 8포가 대표적이다.
1. 김 시식지
○ 우리 나라 최초의 김 양식지 태인도
1980년대 초 까지만해도 태인도(광양시 태인동) 사람들은 겨울철이면 김 양식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농사가 별로 없는 태인도에서는 섬 주변에 서식하는 풍부한 어패류를 채취하는 것과 김양식이 주 소득원이었다. 이 중에서도 김 양식으로 인한 소득은 매우 높아서 김이 생산되는 겨울철이면 태인도에서는 골목을 쏘다니는 개들도 만원짜리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왔다.
이처럼 수산업의 쌀이라 할 수 있는 김 양식이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시작 되었던 곳에 그리고 불과 몇 십년 전 까지만 해도 수 백년 째 김 양식이 번창하였던 곳에 지금은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철을 만들어내는 세계 제일의 광양 제철소가 자리잡고 있다.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 김의 고장인 완도보다 170년 앞선 광양의 김 양식
요즘은 김 하면 완도를 떠올리게 된다.
그 만큼 완도 김은 특산물로써 위치를 굳힌 셈이다.
하지만 김 양식을 시작한 연대에 있어서는 광양김을 따라잡을 수 없다.
“한국수산지”, “조선수산지” 등 관련서적과 양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얘기들을 종합해 보면 완도에서의 김 양식은 1820년 경에 시작된 반면에 이곳 태인도에서의 김 양식은 1650년 경에 시작되었다.
광양의 김 양식이 완도보다 무려 170년이나 앞선 것이다.
또한 광양의 김 양식 사실은 1711년 당시 광양현감을 지낸 허담이 김 양식법을 창안하여 보급한 김여익공의 행적과 공적을 찬양하여 세운 묘비에 기록으로 남아있어 믿음을 더해주고 있다.
○ 태인도에서 김 양식을 최초로 시작한 김여익공
김여익공은 1606년에 전남 영암에서 출생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다가 청주로 가던 도중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낙향하였다.
이후 1640년에 광양 태인도에 들어와 절의를 지키며 숨어 살던 중에 소나무와 밤나무 가지를 이용한 김 양식 방법을 창안하여 보급하였다.
김여익공은 1660년에 별세하였으며 1711년에 호조참판겸 의금부지사에 증직되었는데 김 양식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전해온다.
당시 광양 김은 왕실에 바쳐지는 특산물로써 궁중에서 인기가 높아 임금의 수라상에 자주 오르게 되었다. 하루는 임금이 이 김을 반찬삼아 수라를 맛있게 드시고 나서 음식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신하들 중에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광양땅에 사는 김여익이라는 사람이 발명한 음식입니다.’ 하고 아뢰었다.
이에 임금이 하시는 말씀이 ‘앞으로는 이 음식을 그 사람의 성을 본따서「김」이라 부르도록 하라’ 했다는 이야기다. 이때부터 해의 또는 해태라 부르던 바다풀을 ‘김’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김 시식지는 지방기념물 제113호
김 시식 유적지는 태인동 궁기마을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다. 김여익공을 모시는 재실인 영모제와 묘역은 1987년 지방기념물 제113호(김 양식 유적지)로 지정되었으며, 1992년에는 김시식 전시관이 건립되어 재래식 김 양식 기구를 전시해 놓고 있다.
한편 당시 광양현감 허담이 비문을 지어 1714년에 세웠던 김여익공의 비석은 오늘날 없어져버리고 비문만이 전해온다.
1999년 9월에는 태인동 용지마을 입구에 김 시식지 유래비가 세워졌다.
2. 하포항
○ 하포는 광양항의 중심에 위치
21세기 해양시대를 맞이하여 광양에는 컨테이너 부두 건설이 한창이다.
우연치 않게도 하포항의 옛 영광이 광양항 컨테이너부두 건설로 인하여 국제항구로 재현되는 셈이다.
○ 풍수지리상 홍선출해 형국의 큰 포구, 하포항
하포항은 1912년부터 여수, 부산 등지에 정기여객선이 드나드는 광양만 연안의 중심포구로써 중요한 기능을 해오다 1936년 12월 이리~여수간 전라선 철도가 개통되자 여수항이 크게 활성화 되면서 빛을 잃게 되었다. 하포항이 번창했던 이 시기에는 골약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 등이 하포에 있었으며(1914~1938) 매일같이 황소달구지 5~6대 분의 짐이 들어오고 나갔는데 이 물품들은 일본인들이 각종 물품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광양읍에 설치한 회조부를 통해 전남동부권에 공급되었다. 또한 화물창고와 여관, 주막, 회조부 출장사무실, 시장 등 물품교역에 필요한 시설들이 하포선창 쪽에 밀집해 있었으며, 하포마을 삼거리에서 선창까지 약 2km 구간은 1988년까지 국도로 남아있었다.
당시 하포항은 선창 끝 부분에 목책을 설치하여 잠교식으로 만들어서 큰 선박이 자유롭게 접안할 수 있도록 하였다.
드나드는 선박은 대략 200~500톤 규모의 선박이 대부분이었으나, 3천톤 규모의 선박도 접안이 가능하였다. 한편 예로부터 하포 선창에서 마을에 이르는 언덕배기는 풍수지리상 큰 배가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모양인 홍선출해 형국으로 전해오고 있다.
3. 광양 8포
광양만에 잇닿아 긴 해안선을 끼고 있는 광양지역은 일찌기 크고 작은 포구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육지부에 자리잡아 사람의 왕래와 물품의 교류가 활발했던 8곳의 포구를 이름하여 광양 8포라 불러왔다.
광양 8포는 초남포(광양읍 초남리), 염포(황금동 염포), 상포(황금동 금곡), 하포(황길동 하포), 망개포(성황동 대화), 광포(광영동), 선포(진월면 선포마을), 구포(진월면 구동)이다. 그러나 초남포, 염포, 상포, 하포, 망개포는 광양항 컨테이너부두 건설로 사라지게 되고, 구포는 섬진강 제방설치로 수 십 년 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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