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나루터와 생쇠골

광양의 호국항쟁유적지로는 섬진나루터가 위치한 섬진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이있다. 또한 호남의병 활동의 본거지, 동학 농민군의 마지막 격전지 생쇠골과 가장골돔이 있다.

섬진나루터와 생쇠골의 역사

섬진나루터와 생쇠골

섬진나루터

○ 두꺼비 전설 간직한 섬진마을에 위치
섬진나루터는 섬진강 이름의 유래가 된 두꺼비 전설을 간직한 섬진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섬진마을에 얽힌 두꺼비 전설은 여러 가지가 전해오고 있으나, 대표적으로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고려말에 왜구들이 쳐들어오는데 우리 군사들이 쫓겨서 섬진나루에 이르러보니 건너야 할 배가 없어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었다. 그때 두꺼비 수 백 마리가 강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니 우리 군사들이 다 건너갔다.
잠시 후 뒤쫓아온 왜구들도 두꺼비 등을 타고 강을 건너던 중 강 한가운데에 이르자 두꺼비들이 그대로 강물 속으로 들어가버려 왜구들이 모두 빠져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 섬진나루는 영 · 호남 교통의 요충지
섬진강 하류지역에 다리가 놓인 1930년 경 이전 까지만 해도 섬진나루는 전남과 경남을 잇는 영 · 호남 교통의 요충지였다. 일찌기 진상면에는 섬거역, 다압면 신원리에는 섬진역 등 관영숙소가 있었으며 섬진나루를 통해 하동 · 악양 · 화개방면으로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이루어졌다.
○ 조선초기에 설치된 진은 1895년에 폐쇄
섬진나루에 군인이 배치된 것은 조선 초기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섬진강 수비를 위해 많은 병력이 추가 배치되었다. 1705년에는 섬진나루를 정식 수군 진지로 삼아 수군별장이 1개 중대 병력을 거느리고 머물렀다.
섬진나루에는 경해관이라는 집무실과 창고, 군인들이 살던 집이 여러 채 있었으며 4척의 병선이 있었다. 1895년 섬진진이 폐쇄되기 전 까지 만 해도 1백 24명이 탈 수 있는 큰 병선이 정박했던 섬진나루는 오늘날 수량이 줄고 모래가 쌓여 2톤급 나룻배도 겨우 지나갈 정도이다.
○ 두꺼비 석상과 수월정유허비
한편 섬진나루터에는 수군별장들이 취임기념으로 만들어 세웠던 돌두꺼비 12기가 있었으나 8기는 없어지고 4기만 남아있다. 4기의 두꺼비 석상이 있는 곳에는 수월정 유허비가 함께 서있는데 수월정은 나주목사와 충청감사를 지낸바 있는 정설이 1597년 세웠다.
수월정의 뛰어난 경치는 당대에 널리 알려져 선조 때 형조좌랑을 지낸바 있는 수은 강항은 수월정 풍경을 노래한 시조 30수(수월정 삼십영)를 지었으며, 송강 정철은 수월정기를 남겼다. 오늘날 정자는 없어지고 정설의 후손들이 이곳에 수월정이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고자 1971년 수월정 유허비를 세웠다.
이곳에는 1998년 3월에 섬진강 유래비가 세워졌고 1999년 12월에는 수월정이 건립 되었다.

생쇠골과 가장골돔

우리 광양지역이 구 한말 호남의병 봉기에 불을 붙인 곳이며, 호남의병 활동의 본거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또한 우리 광양이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격전지였으며, 이곳에서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최후를 맞이한사실을 아는 사람 역시 흔치않는 듯하다.
이에 백운산을 본거지로 활약한 호남 의병들의 무기제조 공장지였던 생쇠골과 일본군의 습격으로 최후를 맞이한 동학농민군이 한꺼번에 가매장 되었던 가장골돔을 중심으로 광양지역의 의병활약상과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소개하고자 한다.

○ 생쇠골

진상면 황죽리 구황마을에서 억불봉 쪽으로 2km 남짓 오르면 조개골에 이르고 조개골 좌측 골짜기를 따라 1km쯤 올라가면 여기저기 흩어진 철광석과 철광석을 녹이는데 쓰이는 노를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구 한말 백운산지역을 본거지로 삼아 활약한 호남의병들이 무기를 만들었던 ‘생쇠골’ 이다.
일찍이 황죽리 아래쪽 마을인 진상면 비촌리 평촌에는 백운산 줄기인 불암산에서 나는 철광석으로 농기구와 솥 등을 만들던 ‘철점’이 있던 곳으로 ‘점골’ 이라고 불리웠다. 또한 어치계곡 상류인 용소 아래편과 오로대 윗편 계곡 주변에도 무기제조에 쓰인 쇠똥(슬라그)과 고로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의병들이 생쇠골에서 무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이 지역에서 철광석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생쇠골이 험하고 깊은 억불봉 기슭에 자리하여 적의 침입을 손쉽게 막아낼 수 있는 지리적인 잇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무기를 만들었던 흔적인 철광석과 노는 어치골 구시폭포 윗편에도 남아있다.
한편 광양지역이 호남의병의 본거지가 되었던 것은 골짜기가 깊고 험준한 산세를 가진 백운산이 서쪽으로는 조계산으로 이어지고 북동으로는 지리산으로 연결되며 섬진강과 광양만으로 해상통로가 열려있는 등 당시 의병들이 주로 사용했던 작전인 유격전을 치루기에 적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유로 호남의병 봉기의 신호탄을 올린 전주출신 백락구 의사가 1906년 광양에서 창평출신 고광순과 함께 을사의병을 주도하였고, 뒤이어 우리고장 진상면 출신 황순모, 황병학 의사가 주로 엽총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150명의 인원으로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1906년부터 한일합방 이전까지 계속된 호남의병활동은 백운산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이루어졌으며 활동무대는 광양 순천 보성 장흥 영암 구례 곡성 화순 나주 남원 하동 등 호남일대와 경남서부를 망라하여 광범위하였다.
광양의병의 특징은 우리 고장 출신인 황순모, 황병학 의사의 활동뿐만 아니라 각 지방출신 의병들이 광양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활약했다는 점이다. 백락구(전주), 고광순(창평), 김동신(충남 회덕), 안규홍(보성), 이학사(임실) 등의 외지출신 의병장들이 적게는 50명에서 많게는 500명에 달하는 의병을 이끌고 활약하였다.

○ 가장골돔

‘가장골돔’ 은 1894년 12월 10일 동학농민군 28명이 일본군에게 최후를 맞아 가매장 된 곳으로(섬거마을 뒷편 골짜기) 동학사건 이후에 이와 같은 지명을 얻게 되었다.
1894년 12월은 2차 봉기에 실패한 동학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쫓기어 막바지에 몰리는 시기였다. 조정의 요청을 받아 동학군 진압에 나선 일본군은 정예화된 병력과 발달된 무기를 가지고 충청도와 전라북도 등지에서 동학군을 몰아부쳤다.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동학군이 태백산맥과 강원도등 산악지대로 자리를 옮겨 장기적으로 대항하는 것을 막고 차제에 동학군을 완전히 섬멸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광양, 순천지역으로 동학군을 몰아부쳤다.
일본군과 동학농민군간에 벌어진 광양에서의 최초 전투는 1894년 10월 20일 진주 쪽에서 하동으로 쳐들어오는 일본군과 광양 쪽에 있던 동학군 사이에 벌어졌다. 이 후 12월까지 일본군과 정부군은 동학군이 바다를 통해 도망치는 것을 막기위해 일본군 군함 두 척을 광양만에 띄워둔 채 대대적인 수색작전과 섬멸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1894년 12월 10일 진상면 섬거역(현재 섬거회관자리)에서 섬거출신인 도접주 김갑이 등 28명의 동학군을 학살하였으며 이어서 광양에서만 130명의 동학군을 학살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섬진강전투 중에 강물에 빠져 죽은 동학군이 3, 4천명에 달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동학농민군의 최후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한편 광양읍성 객사자리에서는 당시 동학군 영 · 호남 총사령관이었던 김인배 장군이 정부군에 의해 참수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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