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에는 호국항쟁유적지가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게 광양읍성과 4대 산성(마로산성, 중흥산성, 불암산성, 봉암산성) 이다.
호국항쟁유적 광양읍성과 4대 산성
1) 광양읍성
○ 광양읍성의 성곽과 성문의 위치
광양읍성은 조선조 태종 13년(1413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읍성의 철거는 고종 32년(1895년)에 이루어 졌다. 석축의 성둘레는 800여미터, 높이는 4미터이었고, 동 · 서 · 남문을 지키기 위해 성문 밖에 쌓은 작은성(옹성)이 3개,성위에 나즈막히 쌓은 담장(여장)이 518개, 높이 열자에 깊이 서른 자인 담장(치첩)이 83개 있었으며 성 안에 5개의 우물과 1개의 연못이 있었다.
광양읍성은 읍내리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읍내리’ 라고 부른 것은 읍성이 읍내리 지역에 위치 했기 때문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당시 성내리, 동외리, 과목리, 신흥리 일부와 인서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읍내리라하였다.
성의 위치와 동 · 서 · 남문의 위치를 현재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동문은 읍내리 165번지(농협에서 시계탑 방향으로 10m쯤 지나 건너편에 있는 라피도 의류가계 뒷편 집) 부근에 위치하였다. 그 골목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다 읍내리 183-2번지(수복장 부근)에서 구부러져서 서쪽으로 향하여 등기소 뒷 담장과 상설시장을 지나 읍내리 245-12번지(주택가)에 이른다.
이곳에서 다시 구부러져 남쪽으로 접어들어 읍내리 227-1번지(구 경찰서 뒷담장)에 서문이 있었다. 서문에서 남쪽으로 곧장 내려와서 읍내리 316번지(양곡창고)에서 구부러져 동쪽으로 향하면 읍내리 299-3번지(남문슈퍼 앞)에 남문이 있었다. 이곳에서 계속 동쪽으로 향하다 읍내리 151-6번지(한일장여관)에서 구부러져서 북쪽 끝으로 나가다 동문에 이르렀다.
○ 광양읍성 안의 건물배치
남문과 서문은 각각 2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서문은 집서루, 남문은 청조루라 불렀다. 남문은 1894년 동학혁명때 불타서 1901년에 중건 되었는데 1923년 화재로 다시 불타버렸다.
당시 성안의 건물 배치는 다음과 같다(도표 2참조) 동헌은(현감 집무소) 현재 등기소와 전화국의 남쪽, 부시장 관사 부근이었고, 동헌 건물에 등기소가 설치된 것은 1918년이었다. 전화국 자리에는 동헌의 안채 건물인 내동헌이 있었는데 일명 ‘아낙터’ 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일제시대에는 헌병청으로 사용되었다.
치안과 공공질서를 담당한 형방관리들의 사무실인 형방청과 현감의 비서격인 동인들의 사무실인 동인청, 군인장교의 사무실인 장청 등이 모두 구 경찰서 자리에 있었으며 ‘휘양관’ 이라고 현판이 붙어있는 객사는 구 읍사무소 터에 있었다. 구 보건소 자리에는 무기와 양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으며 감옥은 농협 뒷편(158-1번지)에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오는 주요도로는 광양동초등학교 서쪽 끝 귀퉁이와 광양제재소 사이의 ‘벅수거리’ 에서 남문슈퍼에 이르는 ‘큰골목’ 이었다.
○ 임진왜란 당시 광양전투
임진왜란 때 유명한 전투로 임진왜란사에 기록된 광양전투는 1597년(선조 30년) 12월18일 아군의 광양읍성 탈환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은 백의 종군하여 해남군 울돌목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후 순천시 해룡면 왜교성에 갇혀있는 소서행장을 비롯한 왜군 1만3천명을 도망가지 못하도록 광양만 해상을 봉쇄하고 있었다.
한편 왜적은 일본에서 우두머리인 풍신수길이 사망하고 곳곳에서 전투에 패하자 본국으로 퇴각을 준비하고자 울산, 사천, 순천(왜교성)에 각각 진을 치고 있었다. 이에 아군은 3개 부대를 편성하여 세 방면으로 공격을 하게되었으며 1597년12월23일로 공격날자가 잡힌 울산의 왜군을 공격하기에 앞서 광양 방면에 있는 왜군을 견제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그때 당시 소서행장 부대는 왜교성에 본진을 두고 광양읍성과 순천에 분산하여 주둔하면서 약탈과 살인 등 갖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라병사 이광악은 남원에서 구례를 거쳐 1597년12월18일 밤 광양성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왜군이 수비에 온 힘을 다하였으므로 혼전을 거듭하였으며 드디어 소서행장이 왜교성에서 보낸 왜적의 구원군이 도착되여 아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패하게 되었다.
아군이 패하여 퇴각하는 과정에서 당시 구례현감 김응서 장군이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며 전라병사 이광악은 퇴각하면서도 흩어지는 군사들을 침착하게 수습하여 뒤쫓아 오는 왜적을 막고, 유인, 기습하므로서 전과를 올렸다. 이후에도 이광악 전라 병사는 며칠동안 계속해서 광양읍성의 왜군을 공격하자 견디지 못한 왜군은 마침내 본진이 있는 왜교성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광양성 전투로 인하여 아군은 끝내 왜군을 왜교성에 가두어 놓게 되었고 광양 · 순천지방에서 자행되던 그들의 만행을 봉쇄하였다. 또한 왜군은 광양전투 때문에 울산성으로 그들의 구원병을 보낼 수 없게 되었다.
2) 4대 산성
○ 마로산성
광양읍 용강리 뒤편, 해발 200m의 산 위에 자리한 마로산성은 임진왜란 때 이 지역 의병들이 보수하여 활용하였는데 삼국시대인 600년 경에 만들어진 백제시대 산성이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진을 친의병들은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왜성대에 주둔한 왜군과 대치하였으며 서쪽으로 3km 거리에 있는 광양읍성을 놓고 왜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한편 당시 중흥산성에는 승병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마로산성의 의병과 연합작전을 펼쳤다. 마로산성 – 중흥산성 – 광양읍성 – 왜교산성을 직선으로 이어보면 길쭉한 마름모꼴이 그려지는데 임진왜란 당시 광양읍성의 회복과 군사작전상 우위를 점하기 위해 관군과 의병 · 승병이 연대하여 왜교성에 주둔한 소서행장 부대와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마로산성에는 남과 북에 두 개의 봉우리를 이용한 망루가 있어 광양읍성과 중흥산성 국사봉 가야산 봉화산 초남 앞바다 등 사방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산성의 둘레는 550m인데 돌로 만들어 졌고 동편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며 성곽 동편 마을공동묘지 쪽에 우물이 있었다.
1999년 8월 5일 전라남도 지정문화재(기념물 제173호)로 지정 되었다.
현재 산성 안에는 수십 개의 묘지가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어 아쉬움을 주고있다.
○ 중흥산성
옥룡면 운평리 해발 400m에 위치한 중흥산성은 산 전체가 천연적인 요새를 이루고 있으며 능선을 따라 흙으로 쌓아 만들어진 토성으로 산성의 둘레가 무려 3.4km에 달한다.
4대 산성 중 유일한 토성이며 크기에 있어서도 대단한 규모이다. 임진왜란때 의병과 승병의 훈련장으로, 또 우리 의병 · 승병과 왜군간에 대전투가 벌어졌던 중흥산성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부분 고려시대로 보고 있다.
중흥산성은 당시 광양~구례간(한재), 순천~광양~하동간(곰재)으로 통하는 주요 통행로 상에 위치하고 있어 그 기능이 무척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흥산성에는 사방으로 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문이 있는 지점은 돌로 쌓았는데 중흥사에서 옥룡면 추산리로 넘어가는 오솔길에 위치한 북문의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또한 산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외성 안쪽에 약 240m에 이르는 내성을 흙으로 쌓아 만들었다. 산성 마루에 오르면 광양만 바다와 백운산 능선, 마로산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 불암산성
진상면 비평리 수어댐 바로 우측편, 해발 200m에 자리한 불암산성은 삼국시대인 600년경에 만들어 졌는데 4대 산성중 오르기가 가장 용이한 산성이며 둘레가 500m인 석성이다.
1974년 현재의 수어댐이 건설되면서 사라진 비촌마을이 삼한시대에 비촌현으로 존재하였고, 광양~하동간에 국도가 건설되기 전에 비촌현이 하동~광양~순천을 잇는 주요 교통로 상에 위치하였다는 점은 당시 불암산성의 기능을 추측케 한다.
수어댐 좌측 삼각봉에는 둘레 90m에 이르는 아담한 산성이 불암산성과 마주보고 있어서 비촌현과 어치계곡으로 쳐들어오는 외적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불암산성은 전망 또한 뛰어나 북으로 지리산 주능선, 남으로 수어천을 따라 광양만, 동으로 섬진강변의 봉암산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어댐 건설 이후에는 수어댐의 물빛과 억불봉 주변의 백운산 경치가 멋진 조화를 이루어 탁 트인 전망에 아름다운 풍경을 더해주고 있다.
○ 봉암산성
섬진강 하류인 진월면 신아리 해발 170m 고지에 자리한 봉암산성은 둘레 100m 성 안벽 높이 15m의 아담한 산성으로 남쪽 일부분이 허물어진 외에는 성벽이 그대로 남아있어 4대 산성 중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산성이다.
봉암산성은 삼국시대인 600년 경에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주민들은 이곳을 백제산성으로, 섬진강 건너편 하동 쪽에 있는 산성을 신라산성이라고 불려오고 있다.
섬진강변에 바로 인접한 봉암산성은 강 건너 약간 위쪽에 있는 하동쪽의 산성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섬진강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였다.
산성에 오르면 섬진강 하류와 광양만 바다, 지리산과 백운산 능선이 한 눈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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